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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정영 개인전

작성자
사과나무
작성일
2009.11.12
첨부파일1
조회수
1290
내용

김정영 개인전 초청장

장소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B-16
일시 : 2009년11월15일 오후1시-11월19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지 않은 채로 보다


변청자 | 미술학 박사-미술비평, 문화사회학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광학optics, 즉 불합리한 요소가 조금도 없는 그러한 논리적인 시각vision을 개발시켜야 한다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위해 자연nature과 예술art 그 둘을 같은 것이 되도록 하고 있네. 예술이란 개인의 통각apperception으로서, 나는 이것을 감각으로 구현시켜 그것을 지성의 힘을 빌려 작품 속에 구성시켜 놓으려 하네.

- 폴 세잔느Paul Cézanne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와의 대화 중에서-


작가 김정영의 작품은 사진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도 ‘그림’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다시 한 번 작품을 본다. 그래도 ‘그림을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가는 분명 사진이라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사진보다는 그림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복제도구로 오늘날 사진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사용하였다. 이후 19세기를 거치면서 사진술은 재현의 제작술로 자리매김하였고, 라즐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는 사진을 ‘사물의 순수 객관적 파악’이라고 하였다. 사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는 회화에서의 이미지[記憶像]의 애매성을 일깨워줌으로써 사진이야말로 세계를 명료하게 밝혀준다는 인식을 낳았다. 이 명료함은 사진이 보여주는 세계야말로 진실이라는 믿음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결국 사진은 그림이 표방해왔던 ‘재현representation’의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림과 사진에 얽힌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사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믿음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사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김정영의 작품과 만나는 순간 깨지고 만다. 그가 제시하는 사진 속 이미지들이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진이기 보다 그림으로 보일 확률이 높다. 작가는 왜 이러한 혼란을 초래하면서까지 작품 속 사물들을 불명료하게 만들고 있을까? 언젠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물을 한참 바라보면 그 형태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사물을 치우고 그것을 상상하면 내 기억의 잔상들이 퍼즐처럼 형태를 맞추어간다. 이때 사물의 원형과는 다른, ‘형태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명료함으로 파악한 사실 역시 시간과 공간 속의 어느 한 순간에만 한정될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사과를 먹어버린 후처럼 말이다. 들고 있던 사과와 내가 먹고 난 후의 사과, 물적 존재物的存在였던 사과와 개념槪念으로만 남아있는 사과, 이들은 같은 사과인가 아닌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한 되물음이다. 김정영은 이 물음을 행위의 결과는 물론 과정에서부터 드러나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는 방법론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역시 처음에는 다빈치처럼 사진을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 출발했다. 한 대상을 여러 가지 시각vision으로 수차례 바라본다. 작가가 대상을 관찰observation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만큼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맺힌 (다수의) 상들은 ‘그리는’ 행위를 통해 더러는 지워지고 또 더러는 더해지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되어갔다. 그런데 점차 그리는 행위가 사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는’ 행위 자체가 사진의 이미지로 맺혀질 즈음 그는 더 이상 그 사진들을 화폭으로 옮기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진은 ‘찍은’ 사진이기 보다 그리는 행위가 담긴, 말하자면 그리는 행위가 은폐된 ‘그림’으로 완성된다.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가 드러내고 드러내서 그 자체가 그림이 되어버린 ‘(그리는) 행위’가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통해 극단적으로 말소되었다면, 이제 김정영의 작품에서는 ‘그리는 행위’가 ‘보는 행위’로 전치되면서 화면 안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자신/우리가 보고 있는 수차례의 행위들이자 시간적으로 분절된 행위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중첩되면서 명료함 위에 명료함이 끝없이 중첩된 것이다. ‘명징한 사물을 보는 것이 때로는 피곤하다. 눈에 익숙한 사물들, 어디선가 본 듯한 정물들, 그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게 그대로 두고 찾아보면 안 될까?’라는 작가의 읊조림이 행위로 전환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각예술이라면 김정영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은 채로 보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사진을 그림으로 아니면 그림처럼 보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사진은 ‘빛’으로 영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사물은 언제나 빛 안에, 엄밀하게 말하면 빛의 뒤에서 빛에 의해 드러난다. 그런데 김정영의 작업에서는 사물이 빛 앞에 있다. 사물이 빛을 흡수해서 그것을 반사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온 빛을 자신 안에 머금어 버린다. 빛 앞에 놓인 사물을 볼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다. 견고한 사물일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본 것에 대하여 ‘무엇 같다’라고 예측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림에 나타난 이미지는 화병, 향수병, 우유병, 화분, 사과, 체리 ….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제목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제목으로까지 다시 확인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속 화병에는 꽃이 담겨있지 않다. 향수병에는 향수가 들어 있지 않고, 우유병에도 우유는 없다. 병이란 무언가를 담는 용기이며, 그 안에 담는 내용물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에 따라 그에 알맞은 모양을 갖게 된다. ‘이름에 따라 모양을 갖는다.’는 것은 형태가 사물을 사물스럽게 보여주는 방편일 뿐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료한 형태는 그릇의 현실태이기는 하지만 가능태로서의 속성을 억압하고 나아가 사물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형성을 무화시키는 원인일수도 있다는 의심과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그는 지금도 말한다.


'나는 사물에 반사된 빛과 사물을 투과한 빛 그리고 그 그림자 모두를 한 화면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입체파 화가들이 다시점多視點으로 해석한 사물을 한 화면에 담아내듯이 사물을 비추는 다양한 빛들에 의해 나타나는 사물의 여러 모습들을 한 화면에 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사물과 만나는 방식이자 나를 만나는 방식이다. ' - 작가 비망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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